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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환상향견문록/환상향에서 살아남기

5. 인간이 환상향에 사는 다른 방법

by 판타스웜 2022. 10. 10.

 환상향의 인간 마을은 앞서 알 수 있듯이 극단적으로 폐쇄된 사회이다. 단순히 폐쇄적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오히려 공동체의 성격만 따지면 생각보다 그렇게 폐쇄적이지는 않다.) 환상향 성질상 외부와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기에 인간 마을 내의 인간은 자잘한 마찰이 있어도 서로 웃고 넘길 수 있어야 하며 화목한 가정처럼 서로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환상향의 토착민과 다르게 외래인은 문화적 이질감, 가치관적 불화, 또는 갓 환상들이하고 겪은 사건으로 인한 타인과의 갈등 등 여러 문제로 인해 도저히 인간 마을의 공동체 속에 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또한 환상향의 토착민의 경우에도 극히 드물지만 연애 갈등과 같은 인간 관계에 대한 문제로 인간 마을을 떠날 때도 있다. 어쩌면 당신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 마을을 떠나는 인간은 환상향의 다른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선 형식상 인간 마을이긴 하지만 인간 마을의 공동체보다 풍요신들과 텐구 사회와 교류가 더 활발한 마을 외곽 농장지구가 있다. 이 지역은 앞서 말한 풍요신들과 요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환상들이 당한 농축산업자들이 주가 되는 지역이며, 환상향 인간 마을 고유의 공동체 문화보다는 바깥 세계의 기업형 농업지대 문화가 주를 이룬다. 물론 당연히 그렇다고 이 지역에서 기업형 농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풍요신들은 이런 농법을 대개 매우 싫어하며 이 때문에 텐구 관리인들과 자주 마찰이 있다.) 인기 작물을 중점으로 재배해서 텐구 사회와 적극 교역하는 등, 환상향의 인간 마을과 달리 바깥 세계의 도농 관계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인간 마을을 떠나는 입장에서 보면 외곽 농장지구의 가장 큰 특징은 카쿠레키리시탄 (숨은 크리스천)적인 신앙관과 서방(주로 아메리카 대륙) 농촌과 비슷한 문화 형태이다. 환상향은 어디까지나 바깥 세계에서 도망친 신들이 예찬하는 도피처인데 이런 곳에서 유일신 숭배 사상을 주장하면 심각한 갈등 요소가 되기에 자연스레 카쿠레키리시탄적인 신앙관이 외곽 농장지구에 자리잡았고 많은 서구권 출신 외래인들의 신앙 기반이 되었다. 이는 심지어 서구권 출신 무신론자들에게마저도 큰 안식이 되었는데 이는 보통 서구의 무신론은 기존 유일신 종교와 그 전통과 질서, 지배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핵심인데 이 환상향에서는 이 핵심점 자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이 무신론자들 중 일부는 다시 카쿠레키리시탄으로 회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곽 농장지구는 결국 공식적으로는 인간 마을의 일부이며, 실제로 인간 마을 총회의를 할 때에도 참석하기에 자신이 인간의 공동체와 완전히 떨어지고 싶다면 아예 요괴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이 그나마 들어가기도 쉬우면서 인간스러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요괴 사회는 역시 텐구 사회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텐구 사회는 바깥 세계의 휘황찬란한 대도시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정갈한 텐구의 근대풍 산 속 도시는 도시 생활을 추구하는 외래인에게는 꽤 만족스러울 것이다. 인간 마을의 공동체처럼 매일 이웃과 얼굴을 부대끼며 격식을 차릴 필요도 덜하고 바깥 세계에서 하던대로 직장 상사와 동료끼리만 친목을 다져도 충분하다. 매 주말마다 총회의에 나갈 필요도 없이(비록 심심하면 잔업(야근)을 해야 하지만) 발 편히 뻗고 월급 모아 장만한 라디오로 음악과 드라마를 들으면서 시장에서 사온 가라아게와 맥주를 만끽해도 된다. 물론 그저 이렇게 살 것이면 굳이 바깥 세계로 안 돌아가고 환상향에 왜 정착했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인간이 텐구 사회, 아니, 어지간해서는 모든 요괴 사회에 정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요괴 사회에 살게되는 인간은 애초에 인간 마을에 정착하기도 전에 텐구, 갓파 등의 스카웃을 제안받으며 보통은 바깥 세계에서도 과학자 및 기술자 등 유망한 자들이다. (그래서 보통 스카웃을 제안 받고 환상향에 남는 사람도 상당히 적은 편이다.) 당신이 특별하게 숨겨진 보석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텐구 사회에 정착은 커녕 함부로 출입하는 것도 금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정 텐구 사회로 진입하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환상향 내에서 전투력, 기술력(보통 요리, 제련술, 재봉술) 등을 올려서 텐구 사회의 전투원/기술자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텐구와 결혼하는 것이다. 전자는 우선 기준점이 매우 높고, 설령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 쳐도 어지간히 사교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면 그 능력으로 인간 마을에서 대우 받고 사는 것이 훨씬 평탄하다.(엄밀히 따지면 텐구 사회도 사교 능력이 어느 정도는 요구된다.) 후자의 경우 딱히 인간 본인에게 결정권이 없으며 안타깝게도 필자 일동은 이와 관련된 지식은 거의 없다.

 

 다소 의외지만 오히려 텐구 사회보다 갓파 사회에 별 능력 없는 인간이 정착하기는 더 쉬울 것이다. 바깥 세계 기준으로도 경외스러운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 갓파 학계에서 어엿한 과학자가 되는 것은 텐구 사회의 기술자가 되는 것보다도 아득히 어려운 일이지만 갓파 사회의 잡일꾼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갓파들은 (인간에 비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일단 무리를 지어 공동 연구를 하는 등 어느 정도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이 생활 과정에서 과학이나 기술, 취미 생활과 무관한 영역을 외부자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보통 인간이 자주 잡일꾼으로 뽑힌다. 이는 비록 갓파가 홀로 있을 때는 인간을 보고도 도망치는 성향이지만 그나마 온갖 요괴와 비교해서 인간이 가장 만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갓파에게 잡일을 해주는 대신 임금과 더불어 각종 과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지식을 쌓아 스스로 과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술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진짜로 갓파들과 그 과학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이상, 또는 떠날 능력도 없는 것이 아닌 이상, 보통은 텐구 기술자가 되거나 인간 마을로 되돌아가는 등, 갓파 사회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려 한다. 이는 갓파가 주로 수중에서 생활하다보니 인간과 갓파가 분리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갓파가 (애초에 그리 강하지도 않지만) 인간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약 음양술, 주술, 또는 불도 등을 열심히 연마했고 이에 능하다면 요괴의 산에 있는 모리야 신사나 인간 마을 근처의 묘렌사의 수행원이 될 수도 있다. 모리야 신사의 수행원이 되는 것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요괴의 산에 거주하면서 요괴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수행원이 되는 것이 절대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 모리야 신사의 무녀와 신들은 신앙 수집에 매우 적극적이기에 여러가지 사건에 휘말릴 수 있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줍잖은 주술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야 신사에는 나름 바깥 세계의 문물이 풍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있기에 바깥 세계에 대한 향수를 충족시키기에 매우 좋다.

 

 묘렌사의 경우 요괴들의 절이라 불리며, 금전운 때문에 수시로 찾아오는 방문객들 때문에 새로운 수행원의 정착에는 다소 신중한 편이다. 현재는 인간이 아예 살고 있지 않지만, 종종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고 묘렌사는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다 싶으면 많이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아무리 부처를 모시는 절이어도 요괴들이 주된 구성원이고, 여러모로 과격한 장난과 소동도 피우기에(물론 바깥 세계의 조폭들이 스스로 스님이랍시고 운영하는 절보다야 낫다.) 도중에 못 버티고 좋게 끝나도 그저 방문객 수준으로 남는 경우도 많다.

 

 매우 극단적인 경우로는 홍마관에 메이드나 집사, 기타 하수인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해당되는 인간은 진짜 말 그대로 살 의지를 포기하고 자살하는 대신 자신을 흡혈귀와 그 친구 요괴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제로 홍마관에 도착한 다수의 인간은 도축되어 홍마관의 식량 창고에 보관되고 이윽고 식탁에 오르고 만다. 애초에 현재 환상향의 주된 식인 수요는 홍마관에서 비롯된다.(정작 홍마관의 주인인 흡혈귀는 헌혈 하는 수준의 소량의 피만 섭취해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런 살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알 수 없는 이유로 도축당하지 않고 정식으로 메이드나 집사, 기타 하수인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있다. 홍마관이 환상향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기에 그 수는 한 자리수고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 칼럼을 쓸 수 있을 정도지만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 결국 오래 못 살고 병사, 혹은 노사했다고만 말하겠다.

 

 이 외에도 통상적인 요괴와 친분을 맺어 그들의 하수인이나 잡일꾼, 가정부 등으로 생활할 수 있지만 이런 삶은 ‘요괴 사회로 들어간다.’는 느낌보다는 아예 사회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강하기에 인간으로서의 삶이 매우 불안정해진다. 또는 간혹 전투력이 꽤 강한 경우, 마법의 숲에서 살아가는 인간 마법사들(키리사메 마리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법사라 부르기도 민망한 실력이며 인간 마을 청소년의 일시적인 일탈에 가깝긴 하다.)처럼 홀로 사는 경우도 있다. 물론 결국 어떻게 살더라도 식량을 먹어야 하는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 마을(넓은 의미)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면서 살게 된다.

 

<추가본 1>

 인간이 요괴가 되는 법, 좀 더 세부적으로는 인간이 마법사가 되는 법, 구울이 되는 법 등도 있긴 하지만 이는 환상향 세계에서 금기시되며 심할 경우 하쿠레이의 무녀 등에 의해 즉시 퇴마/처형될 수도 있기에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단순히 ‘무조건 안돼!’ 식의 규정이라면 간단히 언급하고 왜 안되는지 서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도 환상향을 관리하거나 통치하거나 운영하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요괴화가 왜 금지되어야 하는지, 금지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래서 인간의 요괴화가 무조건 금지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허용이 된다면 어디까지, 그리고 왜 허용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 책에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정 다룬다 해도 별도의 칼럼으로 다루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다.